테러·허리케인… "언제 당할지 모를 일"
재난대비용품을 생일선물로 줄 만큼
이제 미국인은 '삶의 안전'부터 생각
강인선기자 insun@chosun.com
입력 : 2005.09.25 23:34 08'
워싱턴에 사는 친구가 생일선물로 ‘재난대비용품 세트’를 사주었다. 상자 안에는 사흘 동안 먹을 수 있는 비상식량과 물, 아주 얇은 방수 담요, 물에 젖어도 켜지는 성냥, 구급약 등이 들어있었다. 집에 두고 있으면 마음의 위로는 될 것 같은 ‘시기 적절한’ 선물이었다.
최근 미국에서 이런 비상용품이 엄청나게 많이 팔린다고 한다.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미국 남부를 무자비하게 휩쓸고 간 후 생긴 ‘노아의 방주 신드롬’이다. 캘리포니아주에 사는 친구는 오래 전에 사놓은 ‘지진대비용품 상자’를 점검했다고 한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카트리나 참사를 계기로 자신이 당할 수 있는 자연재해를 한 번씩 떠올렸던 모양이다.
몇 년 전 밸런타인데이 때는 친구들에게 창문 틈새를 막는 특수 접착 비닐과 테이프를 선물한 적도 있다. 그때는 워싱턴이 생물·화학무기 테러를 당할 가능성이 있다고 해서 한창 긴장했던 시절이었다. “사랑보다 중요한 게 안전과 생명”이라면서 선물을 건넸더니, 초콜릿을 기대했던 친구들이 상자를 열어보고 한참 동안 웃었다.
그뿐이랴. 탄저균이 담긴 우편물이 워싱턴 곳곳에 배달돼 사람들을 한 명씩 쓰러뜨리는 탄저균 테러가 음울하게 도시를 덮고 있을 때는 사무실에도 거의 나가지 않았다. 대량의 우편물이 배달되는 곳은 위험지역이었다. 집에 온 우편물을 뜯고 나면 혹시 봉투에 묻어 있을지도 모르는 탄저균을 제거하기 위해 손을 씻어야 했다. 방독면을 사야 할지 심각하게 고민하기도 했다. ‘무차별 저격 살인범’이 워싱턴 인근에서 떠돌며 공포를 조성할 때는 방탄조끼를 사고 싶었다.
지난 몇 년 동안 이렇게 안전과 안보를 위협하는 일이 끊임없이 발생해, 당시 한국 특파원들끼리 “이제 워싱턴 근무자들은 ‘위험수당’을 받아야 하는 것 아니냐”고 씁쓸한 농담을 하기도 했었다. 9·11 테러 직후 또 다른 테러가 발생할 가능성에 전전긍긍하던 시절에는 다른 주에 사는 친구들이 “여행가방을 챙겨서 자동차 트렁크에 넣고 다니다가 여차하면 피난오라”고 했었다.
미국 사회의 안보에 대한 감각은 2001년 9·11 테러를 기점으로 ‘혁명적’으로 변했다. 사실 그 이전까지 미국 사회는 ‘안보불감증’ 상태였다. 60세 이상의 미국인들을 만나 “9·11 이전에 안보위협을 가장 심하게 느꼈던 때가 언제였느냐”고 물어보면, 대개는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를 든다. 그때는 정말로 소련과 핵전쟁을 벌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 당시 미국인들 중에는 집에 핵전쟁에 대비한 벙커를 짓는 사람도 있었고, 초등학생들은 한 달분 통조림을 학교에 갖다 두었다고 한다. 핵공격이 일어나기까지는 경고시점부터 7분의 여유가 있다고 했기 때문에, 아이들은 학교에서 집까지 가는 데 걸리는 시간을 재보기도 했다고 한다.
쿠바 미사일 위기 이후 미국인들은 미국 본토의 안보에 대해서는 별로 고민하지 않고 지냈다. 그러다가 9·11 이후 화들짝 놀라서 ‘안보과민증’ 상태에 돌입했다. 카트리나와 리타는 미국에게 테러범보다 더 무서운 ‘자연재해’라는 적이 있음을 상기시켰다.
9·11 테러가 미국에 ‘일방적인 외교 성향’을 불어넣었다면, 허리케인은 미국을 ‘내향적’으로 만들고 있다. 미국은 어쩌면 당분간은 카트리나와 리타가 내준 숙제에 골몰하면서, ‘내 발등의 불부터 꺼야 한다’고 생각하는 침울한 거인의 모습을 보일지도 모르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