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 : 2005.03.22, 17:32
고난주간 수요일에 예수께서는 별다른 활동 없이 베다니에 머무르시며 휴식의 시간을 가지셨다. 전날 많은 사람과 변론하셨고 제자들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신 것이 피곤을 가중시켰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피곤 때문에 쉬신 것이 아니다. 앞으로 닥쳐올 십자가의 고난을 준비하시면서 하나님과 깊게 교제하는 거룩한 쉼이었다.
예수님께서 전도사역을 시작하시기 전에도 40일 동안 유대광야에 금식기도하시면서 하나님과 깊은 영적 교제를 가지셨다. 그것을 쉬는 시간이었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세속을 떠나 홀로 하나님과 영적 시간을 가지셨다는 점에서 거룩한 쉼이 분명하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의 공적 사역은 모두 하나님과 깊은 교제, 곧 거룩한 쉼으로 시작하고 마무리하신 셈이다.
이들 두 경우의 쉼 모두 유대광야와 관련이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초기 40일 금식기도는 유대광야 끝에 있는 여리고 근처에서 드렸고 마지막 쉼은 유대광야가 시작되는 베다니에서 가지셨다. 여리고와 베다니는 유대광야 양끝에 위치하면서 예루살렘을 오르내리는 길목이었다. 예수께서는 베다니에서 홀로 하루를 쉬시면서 아래쪽으로 펼쳐져 있는 유대광야를 내려다보셨다. 그리고 3 년 전 그 광야에서 기도하셨던 내용과 사탄의 시험을 되새겨보셨을 것이다. 그때의 그 기도와 유혹이 이제는 십자가라는 고난의 형태로 다가오고 있었다. 예수께서 조용히 거룩한 쉼을 갖고 있는 동안 예루살렘에서는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가룟 유다까지 끌어들여 예수님을 죽이려는 계략을 꾸미고 있었다.
이날 베다니에서는 예수님을 위한 식사모임이 있었는데 식사 도중 한 여자가 매우 값진 나드 향유 한 옥합을 예수님의 머리에 붓는 일이 벌어졌다(막 14:3∼-9). 당시 나드는 인도에서 수입한 매우 진귀한 향유였다. 성경에서도 그 가치가 300데나리온이 된다고 하였다. 그것은 당시 노동자의 1년 연봉에 해당되는 금액이다. 그 여인이 어떻게 그런 값진 향유를 소유할 수 있었으며 무엇을 위해 그것을 간직하고 있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다만 조상 대대로 내려오던 가보였을 것이고 자신의 결혼을 위하여 고이 간직했던 것이라고 추측할 뿐이다. 그 여자의 행위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은 매우 부정적이었다. 그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을 도울 수 있는데 오히려 무의미하게 허비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태도는 정반대였다. 그 여자의 행동을 예수님의 장례를 미리 준비한 것으로 보셨다. 당시 장례 절차 중에는 시신에 향유를 바르는 과정이 있었다. 수제자였던 베드로마저 예수님의 죽음을 앞장서서 반대하고 있었던 상황에서 그 여자는 예수님의 죽음의 의미를 미리 알고 값진 향유를 부은 것이다. 사람은 모두 살기 위하여 이 땅에 왔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죽으러 오신 분이다. 그분의 죽음은 끝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살리는 생명이요 부활이시다. 그래서 온 천하에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이 여자가 행한 일도 함께 전해져 기념이 될 것이라고 하셨다. 온 인류를 대속하실 예수님의 거룩한 죽음을 미리 준비하였던 이 여자의 행동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거룩한 소비였다. 그것은 다시 한번 고난의 음산한 구름 속에서 따뜻함을 전해주는 한 줄기 환한 빛이었다.
예수님의 죽음을 미리 준비하지 못했던 제자들은 얼마 후 뿔뿔이 흩어져버렸고 베드로는 저주하며 주님을 부인하는 실패자가 되었다. 예수님의 시신에 향품을 바를 기회를 놓쳤던 세 여인도 부활하신 날 아침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으로 찾아갔다(막 16:1).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그것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으셨다. 거룩한 쉼과 거룩한 소비,그 의미를 깊이 묵상할 때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