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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Samuelson  님의 글입니다.
언어의 전제성(해설: 심 상필) 2004-09-25 13:51:06, 조회 : 3,376, 추천 : 563

언어의 전제성

요절: "일이 많으면 꿈이 생기고 말이 많으면 우매자의 소리가 나타나느니라"(전5:3)
     [For a dream cometh through the multitude of business; and a fool's voice is known by multitude of words.(Eccles. 5:3)]

1. 언어와 경제 행위
우리나라에는 "말 한 마디로 천냥(千 兩) 빚을 갚는다."라든가, "남아 일언 중천금[男兒 一言 重千金, (비록 남존여비의 봉건시대의 말이지만.)]이라는 속담이 전해오고 있다. 이것은 우리의 경제행위와 말은 밀접한 관련성이 있다는 것을 상징하고 있다. 사실 법률적 의미에서 보면 경제행위는 준법률행위(선점, 사무관리 같은 비표현행위)도 있지만, 대부분  언어를 수단(매개)으로 하는 '의사표시(意思表示)'의 법률행위이다.  즉  오늘 날 많은 경제행위는  언어에 의한  단독행위(유언, 기부행위 등 )와 쌍방의  의사표시의 합치로 성립하는 계약으로 그 내용이 결정된다. 그러므로  언어는  인간의 경제행위의 본질적 구성요소의 하나이다.  

2. 성경과 언어(말, Word)

성경에 의하면,  태초에 하나님께서 말씀의 권능으로  천지를 창조하시고(창1:1-31), 하나님의 형상으로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을 지으셨다.(창11:26, 2:7,19,20 ) 진실로 말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크신 은혜요, 특권이다. 그러나 인간(아담)이 타락한 후 말은 전도(딤후4:2; 롬10:14,15), 구원(롬10:10,13)을 비롯한,인간의 선한 생활의 방편도 되지만, 지옥불을 나르는 혀의 종도 된다.(약3:6)  즉 말은 사람에 따라서 축복도 나르고,저주도 나른다.그래서 성경은 말을 악용하지 말도록 '십계명'을 비롯해서  많은 곳에서 '말의 조심'을 당부하고 있다.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출20:7, 제3계명),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출20:16, 제9계명 )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그런즉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라"(전5:2)고 훈계하셨다.
특히 예수님은 그의 산상수훈에서 비판의 말(마7:12; 참고절 롬2:1), 맹세의 말(마5:34-37 참고절 전10:13-14; 잠15:2; 전5:2-5)과 기도의 중언 부언(6:7-8)등을 금하셨다.
위의 말씀들은  당연히 우리의 경제생활에 관련되는 규준(規準)이고, 실천규범들이다. 참으로 말(Words)의 질서가 바로 서지 않는 사회(즉 불신의 사회)는 반드시  혼란이 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3. 언어의 전제성의 예설(例說)

요새처럼 말 많은 때도 많지 않았던 것 같다. 정치, 경제 등 각종 정책들의 문제에 관하여, 특히 대통령, 국회의원들, 학자들, 언론인들 등 지도층의 말들이 계속 꼬리를 물고 계속되어 온통 나라를 혼란스럽게 하는 것 같다. (2004년도 현재. 참여정부의  대표적인 국가 정책 현안은 수도 이전문제, 친일 진상 규명법 개정문제, 국가보안법 폐지 문제 등이다.) 이들 지도층의 말들 가운데에는 성경이 말하는 '우매자'의 소리(전 5:3)가 적지 않은 것 같다.  
사무엘손(P.A.Samuelson, 미국 MIT의 교수이고, 1970년도의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이 말한 '언어의 전제성(The tyranny of words)'의 폐해를 경계할 필요가 있는 것 같아서 참고로 그의 글을 이 웹 페이지에 게재한다.(source: 'ECONOMICS', Paul A. Samuelson, ninth edition, p.10)

(1)언어의 전제성(專制性)
사회과학에서 우리는 특히 '언어의 전제성(the tyranny of words)'을 경계해야 한다. 이 세상은 그렇지 않아도 복잡한데 여기에다, (a) 같은 것에 대해 2개의 상이한 명칭을 무의식중에 쓴다든지, (b) 2개의 다른 것들에 대해 하나의 같은 용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혼란이나 애매한 점이 더 첨가된다면 견디어 내지 못한다.  
존스가 과잉 저축이  불황의 원인이라고 말한 로빈손을 거짓말쟁이 라고 밀어붙이면서, 자기는 '과소 소비야말로 참된 원인'이라고 말했다고 하자.
다시 슈와르쯔가 이 논쟁에 끼어 들어  '자네들은 둘 다 틀렸어, 참된 문제는 과소 투자에 있다네' 라고 주장한다면, 그들은 언제까지나 논쟁을 계속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들이 만일 논쟁을 멈추고, 사용하는 말들을 분석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는다면 사실에 대한 의견에 큰 차이가 없고, 다만 언어상의 혼란만이 있었다는데 생각이 미치는 결과가 될 것이다.[참고:  (2)번의 사무엘손의 예문해설]  
또한(비슷하게) 말이란 중립적인 태도로  그 말에  반응하지 않기 때문에 애매할 수도 있다. 예로, 정부의 고도성장 정책에 찬성하는 적극파 사람들은 이것을 '현명한 계획화' 프로그램이라고 말할 것이며, 이에 비판적인 반대자들은 그것을 '전체주의적 및 관료주의적 통제'라고 평가할 것이다. 전자와 같이 말하면 반대할 이유가 없어지고 후자처럼 표현하면 찬성하기 어렵게 된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은 같은 문제를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The tyranny of word
Especially in the social sciences, we must watch out for the "tyranny of words." The world is complicated enough without introducing further confusions and ambiguities as (a) two different names are unknowingly being used for the same thing or (b) the same word is applied to two different thing.
Jones may call Robinson a liar for holding that the cause of depression is oversaving, saying, "underconsumption is really the cause." Schwartz may enter the argument, asserting, "You are both wrong. The real trouble is underinvestment." They may go on arguing; but if they really stopped to analyze their language, they might find that there were no substantive differences in their opinions about the facts and that only a verbal confusion was involved.
Similarly, words may be treacherous because we do not react in a neutral manner to them. Thus a man who approves of a government program to speed growth will call it a program of "sensible planning," while an unsympathetic opponent will describe the activity as "totalitarian, bureaucratic regimentation." Who can object to the former, and who could condone the latter? Yet they may refer to the same thing.
(2)사무엘손의 예문 해설(해설자: 심 상필)
(가)국민소득 균형방정식(국민소득의 창출 및 처분 방정식)의 소개
         창출 방정식     균형국민소득     처분 방정식
                  C1 + I     =      Y       =     C2 +  S               (단 S=I, C1=C2)
                   (부호: C1은 창출 방정식의 소비(수요)총액,  C2는 처분 방정식의 소비총액,  I 는 투자총액,  S는 저축총액,)
위 방정식은 케인스(J. M. Keynes, 1883-1946)의 거시경제이론의 균형 국민소득 방정식이다. 왼편의 C1 + I = Y 는 국민소득 창출 방정식으로, 국민의 총소득 Y(GNP)는 국민의 총 소비수요(C1)와 투자수요(I)의 총계로 결정된다. 그런데 다음해에도 같은 수준의 재생산을 계속하자면, 오른편의 처분방정식에서 총 소비(C2)와 저축된 총 저축(S)이 다시 총 소비수요(C1)와 총 투자수요(I)로 돌아가서 그 총계가 그 전년도의 창출 방정식(C1 + I )과  같아야 한다. 즉 전 해와 같은 수준의 소비( C1 = C2)가 유지되고, 동시에 전해와 같은 투자가 요구된다. 이때  저축과  투자도 일치한다. ( S = I)  이때의 균형 국민소득방정식은 반드시  고정된 C1 = C2,  S = I 라는 조건만을 충족시켜야하는 기계적 등식이 아니라,  C1, C2, S, I 등이 가변 하드라도  국민소득 창출 총액과 국민소득 처분총액이 같으면 된다.(C1 + I =  C2 + S )
(나)예설(例說)의 풀이
국민소득(Y)이 위축(불황)될 때, 위의 균형국민소득 방정식(C1 + I = Y = C2 + S )의 세 가지 변수(C1 및 C2, I, S)의 각 관점에서 주장하는 각설은 다음과 같다.
(가) 과잉 저축의 관점(S의 관점)
로빈손은 그 원인을 과잉저축(I〈 S)에 있다고 한다.
즉 위 균형 국민소득방정식(C1 + I  = Y = C2 + S)에서 저축(S)이 모두 투자(I)로 투입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이때  I 〈 S가 된다.)
(나)과소 소비의 관점(C의 관점)
존스는 위 균형 국민소득방정식(C1 + I = Y = C2 + S)에서 소비가 적은 것이 불황의 원인이라고 한다. 즉 처분방정식의 소비(C2)가 창출방정식의 소비수요(C1)보다 적을 때(적게 소비했을 때), 투자(I)는 전년도와 같을지라도 덜 소비한 부분이 저축(S)을 증가시켜 결과적으로 과잉저축(I〈 S)이 된다.
(다)과소 투자의 관점(I의 관점)
수와르쯔는 불황의 원인을  위 균형 국민소득방정식(C1 + I = Y = C2 + S)에서 과소 투자가 원인이라고 주장한다. 즉 국민소득 처분방정식의 저축(S)이 모두 국민소득 창출방정식의 투자(I)로 투입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때도 과잉저축(I〈 S)이 일어난다.(2004.9.25)

4.맺음 말
성경은 "일이 많으면 꿈이 생기고 말이 많으면 우매자의 소리가 나타나느니라"(전5:3)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이전에(B.C.715년경) 호세아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 도다"(호4:6)라고 외쳤다. 오늘 날 우리도  말 많고 지식도 없는 백성이 아닐까? 대통령부터 온 백성이, 특히 그리스도인들이 진지하게 반성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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