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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 상필  님의 글입니다.
성경과 한국 경제체제 2004-07-27 15:24:54, 조회 : 4,200, 추천 : 551

안내의 말씀

할렐루야!
주안에서 사랑하는 저희 웹사이트 방문자 님께 환영과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예수 인터넷 선교회 웹사이트의 메뉴중의 '기독교경제'는 성경에 계시된 경제원리에 관련한 메시지들을  모은 한국 최초의 성경경제원리의 웹페이지입니다. 특히 근간에 게재한 목차 33번과 34번은 지성(知性)과 영성(靈性)이 깊으신 세계적인 명 설교가 이신 제임스 케네디 목사님께서 선포하신 성경 경제원리에 관한 매우 귀중한 메시지들을 번역하여 게재한 글이고, 목차 35번은 필자가 제임스 케네디 목사님의 성경경제관을 소개하고, 한국 경제체제의 성격과 오늘의 당면과제를 간략하게 제시했습니다. 그 이유는 아직도 낡은 사상적 혼미의 구름에 덮여 있는 우리 사회에 하나님의 진리의 빛을 비추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이 웹페이지를 방문하시는 성도 님들도 이 사역에 동참해 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합니다. 그 방법은 이 웹페이지의 메시지의 내용을 많은 분들에게 추천하고, 선전하고, 설교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이 성도 여러분에게 항상 충만하시기를 기도 드립니다.
                       2004년 7월 27일   예수 인터넷 선교회   심 상필 올림

차례
1.머리 말
2.성경의 경제학관
3. 한국 경제체제의 성격과 당면과제
4. 맺음 말


성경과 한국 경제체제
1. 머리말
인류의 긴 역사에서 보면 각 인류집단의 공동생활체는 환경과 문화의 특성에 따라 각기 다양한 경제체제(Economic System)을 갖고 생존해 왔다. 온 지구가 하나의 세계(global village)가 되어 서로 교류하는 현대에 이르러서도  그것은 변함이 없는 측면이 있다. 그러나 크게 두 가지 개념으로 포섭하면 자본주의(capitalism)와 사회주의(socialism)의 두 경제체제로 나눌 수 있다. 이들은 이 세상에서 각기 그 나름대로 인류의 행복이란 공통의 궁극적 목표를 지향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같고, 다만 그 실현의 수단의 차이가 있을 뿐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그러나 자연적 세계(visible world)뿐만 아니라 영원의 세계(invisible world)를 포함하는 하나님의 세계에서의 경제원리는 다르다. 현세뿐만 아니라 영원의 세계를 포함하는 경제원리를 계시하고 있는 책이 성경이다. 그러면 성경이 가르치는 현세적 경제원리는 무엇인가? 즉 어떤 "주의(ism, principle)"의 경제시스템이 성경의 경제원리인가?  이 글에서는 이 명제를 살피고, 다음으로 한국경제의 특성과 당면과제를 알아본다.

2.성경의 경제학관(경제원리)
성경이 말하고 있는 몇 가지 주요한 경제원칙을 살펴보면, 사유재산을 십계명으로 보호하고(출20:15), 노동을 의무로 명령하고(살후3:10), 자선을 권장하고(눅6:38; 마6:2-4,19-21), 경제활동의 자유와 이익 창출의 책임을 명하고 있다(마:14-30). 이 성경의 경제원리는 오늘 날 사유(사유재산제도), 자유(경제활동의 자유), 영리(개인의 이윤 추구의 허용)의 3대원칙을 특징으로 갖는 자본주의와 근사하다. 그러나 막스 베버(M.Weber)가 말한 무신론적인 천민 자본주의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베버는 성경[특히 종교개혁사상인 칼빈주의(calvinism)]에 기초한 자본주의를 윤리적 자본주의라고 이름지었다. 그리고 이 글에서는 성경의 경제원리를 필자가 학술적 차원에서 이론을 전개하지 않고 제임스 케네디 목사(Dr.D.James Kennedy)의 "성경과 경제학(THE BIBLE AND ECONOMICS)"의 메시지를 제공한다.(참고: 예수인터넷 선교회의 '기독교경제, 목차 33번)

제목: 성경과 경제(the bible and economics)
미국은 세계의 눈에 경이의 나라였습니다. 미국은 자유의 고향이고 용감한 사람의 땅이고, 비할 바 없는 기회의 땅이었습니다.
  이것은 수백만씩 이 풍요의 해안으로 왔던(이민으로) 고독한 사람들, 빈곤한 사람들, 험한 세파에 시달린 사람들에게 빛나는 정오의 태양이 그 빛살을 땅 끝까지 보내는 산 위에 세워진 도성 같았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사람들에게 그 꿈은 사라진 것 같습니다. 많은 미국 사람들에게 기회는 가버린 것 같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불만에 빠졌습니다. 무언가 잘못되어 가는 것 같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도대체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꼬집어 말할 수 없습니다. 나는 말하면 도무지 인기가 없는 화제이지만, 오늘날 우리나라(미국)가 당면하고 있는, 매우 중요한 문제의 부분에 관하여 여러분에게 말하고자 합니다.
  나는 성경이 경제에 관하여 말씀한 것에 관하여 여러분에게 말하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정치가들의 대부분은 그것이 마치 역병(전염병)인 것같이 이 주제를 회피합니다. 하나님께서 경제에 관하여 하실 말씀을 듣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이것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매우 난해하고, 너무 이론적인 주제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실제적인 주제입니다.
  우리 각자는 경제학(경제법칙)의 세계의 그물 안에서 그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경제학(경제의 원리)을 이해하고, 이 나라(미국)가 어디에서 잘못되어 가고 있는가를 아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미국의 경제적 탈선(빗나감)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매우 천천히 그리고 매우 점차적으로 일어났습니다. 그것이 일어나는 데 수십 년이 걸렸습니다. 그래서 감지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비켜서서 하나님의 말씀의 안경을 쓰고, 우리가 어떻게 잘못되었는지를 알기 위하여 오늘날 미국에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살펴봅시다.
첫째, 하나님은 사유(개인) 재산제도를 정하셨습니다.
   성경은 경제학에 관한 교과서가 아닙니다. 또한 정치학이나 과학에 관한 교과서도 아닙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들의 주제들에 관하여 말한 것이 많습니다(즉, 성경 속에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것은 참되고 가치가 있습니다. 이런 가르침들로부터 우리는 일정한 시스템(system)들을 세울 수 있고, 이 주제들에 관한 이해(지식)를 끌어낼 수 있습니다. 성경은, 인간이 그 자신의 재산을 소유하는 권익(interest)을 갖고 있다는 것과 이것은 하나님의 처벌의 화염검에 의하여 보호되고 있고, 십계명(너희는 도적 질 하지 말찌니라, 출20:15)에서 보증되고 있다는 것을 명백히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우리의 시험(검정)을 수해하기 위하여 우리가 이 세상의 재물을 사용(이용)하는 것이 필요할 것을 아십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정직성을 보이려면, 우리는 개인적 소유권(사유재산)을 행사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유재산권을 보장하셨습니다. 이것만으로도 어떤 제도들은 제외합니다. 그것은 공산주의나 인간으로부터 그의 재산권을 빼앗는 여러 종류의 사회주의 같은 것, 즉 사유재산을 부정하는 제도들은 제외합니다.
  성경은 욕심과 탐심과 시기와 질투와 같은 경제문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다른 것들에 대해서도 많은 말씀(하나님의 말씀)을 갖고 있습니다.
  성경은 또한 노동(일)에 관한 말씀도 갖고 있습니다.
둘째, 하나님은 일하도록 정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일이란 조금이라도 가능하면 회피되어야 할 저주이고, 필요할 때에만 종사될 활동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타락 이전에 일을 하도록 명하셨습니다. 일은 저주의 부분이 아닙니다. 아담은 그가 죄에로 떨어지기 전에(타락하기 전에) 동산(에덴)을 돌보도록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비록 타락과 저주의 결과에 의하여 심히 악화되었을지라도 일(노동)은 인간생활에서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여전히 진리입니다. 일이 없다면 어떤 인간이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그에게 주셨던 시험(검정)을 수행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즉, 인간의 일은 하나님의 심판자료 입니다). 오늘의 본문(살후3:10)에서 바울은 놈팡이(게으름뱅이)에 대해서 조심스럽게 말하지 않았습니다(오히려 매정하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살3:10)
  오늘 여러분이 이 말을 듣기 오래 전에 자주 들었을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인간은 악에 치우치는 성향이 있어서 태만과 나태에 기울기 쉽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그가 할 수 있으면, 모든 일할 기회를 기피할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사람이 일하기 싫어하면 그 사람은 먹을 수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이 말씀은 일할 능력이 없는 사람에게 말한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절름발이, 소경, 병자, 불구자, 노인과 연소자는 돌보라는 말씀을 많이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일하기 싫어하면 그런 사람은 먹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죄에 관한 보편적 동기 때문에(역자해설: 일반적으로 살전 3:10절을 설교자들이 게으른 자들에 대한 책망의 동기로 선포한다는 뜻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이 이 말씀(살후3:10)을 들을 때 마치 이 말씀이 동정 없는 매정한 것처럼 죄의 가책(양심의 고통)을 느낄 것입니다. 이것(살후3:10)이 이제껏 말해 왔던 경제학의 주제에 관한 가장 동정적인 진술(언명)이라는 것을 여러분에게 말씀드립니다. 그 동정적인 말이 널리 따라지지 않는다면, 그곳엔 온 세상을 괴롭히는 대대적인 기근과 아사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의 글에 밑줄을 긋게 하고, 진한 대문자들로 선포되게 하십시오.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면 먹지도 말게 하라."
셋째, 정의는 차별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매우 많이 정의와 자선(사랑의 부조)에 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과 경제학(본 메시지의 주제임)에서 이 주제에 관한 개념들(정의와 자선)은 상충하기 때문에, 오늘 나는 특히 이것들(정의와 자선)에 대하여 여러분의 주의를 말하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나는 여기에 우리 시대의 가장 큰 혼란의 근원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정의와 자선(사랑의 부조)의 혼동은 오늘날 미국에서 국민 총생산량(GNP)의 성장을 감속시키면서, 그리고 사람들을 실직시키고, 온갖 종류의 경제적 혼란을 만들면서 우리의 생산력의 결핍을 야기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정의와 자선 사이의 차이를 이해하는 것은 극히 중요합니다. 아마 95%의 미국의 국민이 참으로 정의와 자선이 무엇인가를 명백하게 정의를 내릴 수 없는 것 같습니다(즉, 정의와 자선의 의미를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잠시 이들(정의와 자선)에 대하여 생각해 봅시다. 무엇이 정의입니까?
  첫째로 기억할 것은 정의는 눈이 멀었다는 것입니다(즉, 정의는 장님입니다). 우리는 수세기 동안 그것을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을 노력해 왔습니다.
  지금 손에는 높이 든 저울과 칼을 갖고, 그 눈을 가리개로 가리운 그 유명한 정의의 동상이 마음에 떠오릅니다.
  정의는 차별(구별)하지 않습니다. 정의는 사람의 신분이 높거나 낮거나, 부자이거나 가난하거나, 흑인이거나 백인이거나, 노동자이거나 비 노동자이거나, 보지 않습니다(즉, 차별하지 않습니다). 또 정의는 사람의 국적도 보지 않습니다. 정의는 사람의 종교도 따지지 않습니다. 정의는 모든 사람을 똑같이 다루고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대우합니다. 이것이 정의의 본질입니다. 또 그 동상(위에 예를 든 동상)은 국가의 강제력에 의하여 집행되는 권력을 상징하는 칼을 기억하게 합니다. 국가와 법과 정부의 기본 임무는 정의의 실행(집행)이고 모든 사람의 권리를 평등하게 보호하는 것입니다.
넷째, 자선(사랑의 부조)은 차별적이고 자발적입니다.
   반면에 자선은 강제에 근거하지 않고, 눈을 가리지도 않습니다. 자선은 차별적이고 자발적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자선의 자발적인 면모를 제거한다면, 그것은 자선이기를 그칩니다.
  만일 로빈후드(주1)가 어떤 부자의 목에 그의 칼을 들여대고 그에게서 그의 지갑을 빼앗고 그의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 후, 그 부자가 그의 친구들에게 자기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선을 베풀었다고 말했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부자의 편에서는 단 한 푼 어치의 자선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이 자선의 자발적인 면모를 제거한다면, 그것은 약탈이 됩니다. 그것은 법률에 의한 약탈입니다. 그것은 자선이 아니라 강도질입니다. 정의와 자선의 혼동이 소위 복지국가의 논거(기초)라고 부르는 사회정의(社會正義)라는 것을 만들어 냈습니다. 사회정의는 이 나라(미국)의 경제적 복지에 엄청난 부정적 효과를 주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강제로 A로부터 돈을 빼앗아 B에게 그것을 준다면, 여러분은 자선이나 정의를 가질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그것이 자유로운 의사결정이 아니었기 때문에 사랑(자선)을 갖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A와 B를 똑같이 취급하지 않고 한 사람으로부터 빼앗아(취하여) 다른 사람에게 주었기 때문에 또한 정의를 갖지 않습니다. (이 경우) 각자의 권리는 보호되지 않고 빼앗겼습니다.
다섯째, 사회정의와 부의 재분배
   이 사회정의의 개념의 배후에는 더 공정한 부의 재분배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숨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반복적으로(되풀이하여) 듣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너무 자주 들었기 때문에 나는 대다수의 미국인들이 그것을 용납해 왔다고 확신합니다. 그래서 더 공정한 부의 재분배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 개념의 배후에는, 똑같은 크기(규모)를 유지하는, 어떤 하나의 정태적인 크기(규모)의 파이(pie)의 관념이 전제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보면) 여러분의 집단이 8명인데 파이(pie)는 하나입니다. 그런데 그들 중에서 그대가 매우 큰 조각(평균적으로 나누면 1/8이어야 합니다)을 갖는다면, 그대는 다른 사람을 약탈하고 있다는 것이 명백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대가 더 가질 유일한 이유는 다른 사람이 더 적게 갖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의의 견지에서 보면 개입할 필요가 있습니다. 정의는 우리가 그대의 파이(pie) 일부를 취해서 적게 가진 어떤 사람에게 그것을 주어야 할 것을 의미합니다. 그 개념은 미국에서 매우 보편화된 생각이 되었기 때문에 그것은 조심스럽게 검토될 필요가 있습니다.
  무엇 보다도, 이 개념은 공산주의의 전형적인 정태적 경제학관을 수용(용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전적으로 이 나라(미국)를 번영케 한 자유경제시스템에 조화되지 않습니다. 자유시장 경제는 성장하는 경제파이(economic pie)를 가정하고, 한 사람이 더 갖으면 다른 사람이 필연적으로(불가피하게) 적게 가져야 한다고는 결코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것은 정확하게 그 반대입니다. 한 사람이 더 생산하는 과정 중에서(경제파이를 더 크게 하는 과정 중에서) 더 갖는다면, 그는 모든 다른 조각(경제파이의 분배 량)의 확대에도 성공한 것입니다.
  예컨대, 헨리포드는 가난한 사람으로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그는 수 십억 달러를 벌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공산주의의 정태적 관점에서 보면, 그는 다른 사람을 약탈함으로써 수 십 억 달러를 가졌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즉, 그는 우리 모두를 약탈했고, 우리의 부(富)의 일부분을 취해간 것(빼앗아 간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만일 정의가 지배한다면, 그가 그의 이득에 의하여 우리를 빈곤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우리는 헨리포드로부터 우리에게서 빼앗아 간 우리의 부의 몫을 빼앗아서 그것을 우리들 사이에 나누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진리입니까? 그 반대가 진리가 아닙니까?
  헨리포드 때문에 우리 각자는 더 부유하게 된 것이 사실(진실)이 아닙니까?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은 오늘 교회에 걸어서 오거나 말을 타고 오시는 것을 선호하시겠습니까?
  다른 사람이 이익을 얻을 때 우리가 이익을 얻지 못하는 때는 국가가 간섭해서 독점을 창조하는 때 밖에는 없습니다. 그럴 때에는 시장의 작용은 실패하고, 다른 사람은 더 가난해 질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유시장 경제학의 온전한 개념에 반대되는 것입니다. 나는 우리의 시대에서 자유기업이나 시장경제 혹은 우리의 반대자들이 비난조로 자본주의라고 부르는 이 온전한 개념보다 더 폄훼(모욕)된 것은 거의 없다고 생각합니다.
  나의 친구여, 오늘날 자본주의가 이 세상에서 큰 악의 근원입니까? 혹은 자본주의가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주신 큰 은혜 중의 하나 입니까?
여섯째, 자유시장과 경제성장
   아담 스미스는 미국이 건국된 1776년에 그의 유명한 기초작품인 '국부론(國富論)을 발간(저술)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미국)는 국부론과 동갑(同甲)입니다(함께 태어났습니다).
  (미국의 자유제도 같은) 그런 자유제도가 세워진 바탕의 기본원리들의 일부는 성경이 계시했지만, 사람들은 그 원리들을 모두 함께 포함하지 않았습니다. 종교개혁자들 중, 특히 칼빈은 그 원칙(원리)들의 많은 것을 빛으로 갖고 오는 것을 도왔습니다(즉, 성경의 원리를 많이 밝혔습니다). 그 토대 위에 아담 스미스는 마침내 그의 국부론에 부분적인 원리들을 내포시켰습니다. 이것이 1780년경 현대 자본주의가 시작되었다고 학자들로 하여금 말하게 했습니다.
  1780년에 프랑스인의 5분의4가 여러분과 내가 어떤 웨이트레스(심부름하는 여자)에게 주는 보잘 것 없는 팀(tip)이라고 생각하는 것만 갖고서, 그의 수입의 90%를 양식을 위하여 소비했습니다(소위 엥겔계수가 매우 높았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다른 필요를 충족하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같은 해 독일에서는 1,000명 미만의 사람들이 1년에 1,000달러나 그 이상을 벌었습니다. 유럽은 수 천년 동안 같은 상태의 생활을 해왔습니다. 1780년경, 유럽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생존 임금의 수준에서 살면서 하루 벌어서 하루를 사는 삶을 유지하는 형편이었는데, 이것은 마치 현대의 아프리카와 거의 다르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종교개혁자들에 의하여 선포된 성경의 원리들은 제자리에 놓이고 효과를 나타냈습니다(즉, 종교개혁자들의 사상에 의하여 성경의 경제학(성경의 경제원리)이 지배하기 시작했습니다).
  1800년에서 1850년까지 인플레이션을 제거한 실질임금이 4배로 증가했습니다. 1850년에서 1900년까지도 인플레이션을 고려한 실질임금이 또다시 4   배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19세기에서는 사실상(실 질상)의 부와 소득은 16배나 증가했습니다[4배×4배=16배(기준 년도 1800년)].
  세계는 19세기 이전엔 결코 그와 같은 것을 본적이 없습니다. 영국에서 이것은 사실이었습니다. 자유기업이 그의 자유로운 경영권을 가졌던 미국에서는 더욱 사실(진실)이었습니다.
일곱째, 공짜로 얻는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다시 국가주의(공산주의 또는 사회주의) 개념들이 행진하기 시작했고, 사회주의자의 몽상(이상향)이 사람들의 마음 위에 마술 같은 주문(呪文)을 거미줄처럼 짜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의 생각과 욕망에 배어 있는 '공짜로 얻는 것은 없다'라는 옛 생각(사상)은 사라져, 드디어 국가주의의 개념들이, 풍부와 기회의 나라인 미국을 만들었던 경제시스템의 형식에 더욱 더 간섭하고, 파행화 시키기 시작해서 오늘날 우리는 거대한 경제문제를 갖게 되었고, 우리의 등뒤로 한발을 묶고 외발로 깡충깡충 뛰게 만들었습니다.
  1982년에 2,839 억 달러가 한편의 사람들의 집단(주로 부자들)에게서 다른 집단(주로 가난한 자들)으로 이전되었습니다. 이 돈은 이전(이연)지불이라고 불리워 집니다. 이 이전지불금은 사회정의(社會正義)라는 이름으로 정태적인 경제적 파이의 이름으로, 부의 공정한 재분배의 이름으로, 성경에 명백히 윤곽이 나타난  대로 자유기업의 시스템이 경제적 확장(성장)과 단순히 부족한 물량의 분배보다는 오히려 우선순위가 생산에 두어지도록 준비를 갖추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면서 이루어졌습니다.
  오늘날 이 시스템의 약간의 결과들을 나와 함께 생각해 봅시다. 복지국가는 불가피하게 그것(복지국가)이 치료하려고 착수하는 것을 더 많이 생산합니다(즉, 고치려는 병폐를 더 만들어 냅니다).
  35년전 이 나라(미국)에서는 실제로 이전지불이 없었습니다. 근간 우리 인구의 거대한 비율이 매우 가난하여 2,830 억 달러의 이전지불을 받았고, 이것은 계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들은 정부가 보조하는 것을 더 많이 만들어 냅니다(즉, 새로운 보조를 더 요구합니다). 만일 닭고기 한 파운드가 1달러로 팔리고, 정부가 그들(닭 키우는 사람들)에게 1파운드에 1달러50센트를 보조한다면, 무엇이 필연적으로 일어나겠습니까? 그대의 겨드랑이까지 닭속에 파묻힐 때까지 5년이 걸릴 것입니다!(즉, 5년이면 그렇게 될 것입니다)
  복지 시스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복지제도에 의존하는 더욱 더 많은 사람들을 가질 것입니다(즉 더욱 더 많아질 것입니다).
  1830년에 미국에 건너왔던 유명한 불란서의 철학자 드 토크밀은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이런(다음) 예언을 했습니다.
  "미국은 민중이 자신들이 투표를 해서 국고로부터 보조금을 빼낼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기까지 계속할 것이다."라고
  "보조금(Largesse)"이란 막구페이 독본을 읽는 6학년생이 아는 용어입니다. 오늘날 근대교육을 받은 평균 수준의 미국 사람들은 아마 그 말의 의미를 모를 것입니다.
  이해 못하시는 분들을 위하여 내가 번역을 하겠습니다.
  "그들 스스로 선물이나 동냥(보조금)이 국고로부터 나오도록 투표하는 것"입니다. 미국은 공중이 그것을 알기까지 지속할 것입니다.
  공중은 철저히 공짜를 발견했습니다.
  공중이 발견하지 못했던 것을, 정치가들이 나머지의 사람들이 알도록 기를 쓰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기관차와 같이 달려오고 있습니다. 미국 사람들은 그대들이 연방정부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궁금해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얻을 수 있는 것)을 가질 권리를 갖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요구할 것입니다! 정치가들은 다른 사람들의 돈을 분배(주는 것)함으로써 표(투표권)를 살 수 있습니다.
여덟째, 복지국가를 갖는 슬픈 결과
   복지국가는 공금(公金)을 이용하려는 국민의 욕구를 창조합니다. 복지 혜택을 받는 사람들은 돌보아지길(국가의 보조금을 받기를) 기대할 것이고, 언제나 더 많은 돈을 원할 것입니다. 복지 혜택을 받지 않는 사람들은 부러움이 커지고, 완전히 지원을 받는 것을 바라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그들의 이기적 목적을 위하여 도움을 받기를 원하는 마음이 커질 것입니다.
  일하는 소수의 사람들은 사기가 떨어질 것입니다. 그들은 생활비를 벌기 위하여 일은 불필요하고, 탐탁치 않는 것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사람들이 더 이상 일하기를 바라지 않거나 힘든 일을 원하지 않을 때 경제시스템은 무너질 것입니다.
  복지국가는 불가피하게(필연적으로) 갈등을 낳습니다. 지난 밤 미국 대통령(아마 레이건 대통령인 것 같다)이 어떤 곳에서 연설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후 한 무리의 항의자들의 회견을 받았습니다. 그들 각자는 그것이 무엇이던 간에 그의 작은 일을 위해서 국고로부터 더 돈을 받기를 원하기 때문에 호박벌(깡패 같은 사람)보다 더 성을 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위하여 돈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저것을 위해서 돈을 원합니다. 나에게 돈을 주시오, 나에게 돈을 주시오, 나에게 돈을 주시오."라고 그들은 외쳤습니다.
  사회의 모든 분야는 사회가 증오, 폭동, 그리고 궁극적으로 무정부상태로 퇴보할 때까지 다른 사람의 목을 조를 것입니다.
  정부가 거액의 돈을 거두어서 가장 궁핍한 사람들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가장 정치적 압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때 여러분은 다른 그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궁극적인 수익자는 예정된(받아야 할 사람) 수령인이 아니라 그것을 관리하는 관료들입니다.
  워싱턴에서 일하는 사람이 출·퇴근하며 사는 두 군(지역)인 메어리랜드주의 한 군(지역)과 버지니아주의 한 군(지역)은 왜서 미국에서 가장 높은 개인 당 소득을 갖고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관료들이 살고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난한 인디언을 돕기 위하여 1인당 3만 달러씩 주지만 그들이 간신히 살아가고 있는 것은 왜 그렇습니까?
  인디언을 다스리는 인디언 사무국 사람들은 잘 살고 있습니다 그려.
  (셋째로) 공적 자선이나 국가의 자선은 악습과 나태(게으름)로 인도합니다(초래합니다). 개인적(사적) 자선은 아시는 바와 같이 차별(잘 분간함)하여 행합니다. 즉 개인적 자선은, (예를 들면) 만일 22세의 자식이 집에서 살며, 실직 상태에 있으면서, 생계를 양친에게 의지하고 있다면, 양친은 그 자식이 앞으로 9 개 월 간 빈들거리며 나가서 직장을 구하지 않는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앉아 있지 않는 것 같은 방법으로, 자선(사랑)은 개인의 삶의 방식과 합당성을 참작합니다. 양친은 그 자식을 거리로 내보내면서 일거리를 찾아 보도(pavement)를 걷도록 할 것입니다.
  연방정부가 자선을 한다면, 그것은 휴가 가기 좋은 때입니다. 프로리다로 가자! 개인 자선은 근검을 조장합니다. 공적 자선은 부도덕과 나태를 생기게 합니다. 그대가 사생아를 먹여 살리면, 그대는 더 많은 사생아를 가질 것입니다. 이것이 경제학의 기본법칙입니다.
  (넷째로) 공적 자선과 복지국가는 개인 자선을 파괴합니다. 지난해 정부는 2,830억 달러를 시민으로부터 징수했습니다. 이것은 개인 자선을 위하여 이용할 수 없게 한 돈입니다. 무엇이 행해질 수 있었는지를 생각만 해 보십시오. 개인 자선을 더 많이 하지 않는 것에 대하여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재산들을 모두 정부가 가져가면,  개인 자선을 하는 사람들이 갖고 자선행위를 할 수 있는 재산은 매우 조금만 남게됩니다.
  이 모든 것은 국가 주권주의와 불 신앙(不 信仰)으로 인도합니다. 사람들은 교회와 선하고 온전한 모든 선물의 공급자이신 하나님께 사람을 이끄는 대신에 그것은 사람들을 점점 더 세속화된 국가에로 인도하고 더욱 더 불 신앙의 민중을 만들어 냅니다. 더욱이 그것은 우리의 영혼을 정부라는 가게에 팔기 때문에 자유의 상실, 또는 전제 정치에로 이끕니다.
  더욱 더 많은 사람들이 죽 한 그릇, 혹은 어떤 사람이 말했듯이 한 냄비의 사회주의 메시지에 타고난 귀중한 권리를 기꺼이 팔고 있습니다.(주2)
  그들은 결국 한 국민이 전적으로 국가에 의존하고 자유를 잃는 상태가 될 것입니다. 그것은 또한 인생의 의미의 상실을 초래합니다. 사회주의자들은 이것이 존재하는 모든 삶이라고 말합니다. 즉, 여러분은 오직 한 번만 살뿐입니다. 그러므로 이 인생 속에 있는 사물들은 모두 중요하고도 유일한 것입니다. 사회주의자들은 어떤 사람도 실패하도록 허락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이것(우리의 삶)은 존재하는 유일한 삶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이 세상의 삶에서) 실패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전적으로, 그리고 영원히 실패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이것(이 세상의 삶)은 지옥이냐, 그렇지 않으면 천국에서 누리는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할 시험(probation)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이 시험을 어떻게 치르느냐가 우리에게 영생이 생기는 것을 결정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성공하거나 실패할 기회를 가져야 합니다.
  사회주의자들은 이것을 그의 유물론적, 무신론적인 인생관 때문에 전적으로 부인합니다. 그래서 인류의 삶을 위한 하나님의 목적, 그리고 그것과 더불어 모든 의미와 중요성을 방해합니다. 이것이 바로 서구의 국가 중 가장 사회주의화된 나라인 스웨덴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자살율을 갖고 있는 이유입니다. 그것이 바로 소련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알콜 소비 율을 갖는 이유입니다. 삶을 위한 빵을 모두 정부에서 공급받았지만 인생은 그것의 모든 삶의 의미를 상실했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살 가치가 없어졌습니다.
아홉째, 우리가 그것을 얻기 위하여 일하지 않아도 얻는 한가지 일
   하나님은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게 하지도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위하여 일할 수 없는 한 가지 일이 있습니다. 바로 영생입니다. 그것(영생)을 얻는 것은 우리의 능력을 초월합니다. 사람에게 주어지는 값없는 유일한 선물이 있습니다. 비참하게도, 사람들은 그것을 혼란시키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 세상의 삶을 마음대로 살려고 애쓰고 내세를 무시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세상의 삶에서는 일해야 한다고 말씀하시고(살후 3:10), 영원한 생명의 선물은 하나님의 은혜로 주시고,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값이 치러졌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가지나 순무를 재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해가 지면 하나님은 "비켜라, 이것은 전능자가 할 일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어떤 교회를 운영할 수 있고, 또는 설교를 선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류의 영원한 구원에 있어서는, 하나님은 "비켜라, 이것은 하나님의 구속주가 할 일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우리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뜻과 의미와 목적을 헤아리면서(계산하면서), 우리의 손으로 착수(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면서(엡4:28), 값없는 영생의 선물을 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의 말씀대로 궁핍한 (필요한) 사람들에게 주어야 할 이 세상의 재물들을 저축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고 그의 나라가 확장되도록, 이 세상의 삶에 필요한 물질적 재물이 부족한 사람들에게 자선과 동정(연민)이 풍부하게 합시다.

3. 한국 경제체제의 성격과 당면과제
(1)한국경제의 헌법적 질서(성격)
(가)재산권의 보장
대한민국의 기본법인 헌법은 제2장 제23조에서 국민의 기본권으로 재산권(사유재산권)을 규정하고 있다.
  모든 국민의 재산권은 보장된다. 그 내용과 한계는 법률로 정한다.
  재산권의 행사는 공공복리에 적합하도록 하여야 한다.
공공필요에 의한 재산권의 수용 . 사용 또는 제한 및 그에 대한 보상은 법률로써 하되, 정당한 보상을 지급하여야 한다.
(나)경제상의 자유의 보장
대한민국 헌법 제9장 제119조는 대한민국의 경제질서의 기본원칙을 다음같이 규정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경제질서는 개인과 기업의 경제상의 자유와 창의를 존중함을 기본으로 한다.
국가는 균형 있는 국민경제의 성장 및 안정과 적정한 소득의 분배를 유지하고,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의 남용을 방지하며, 경제주체간의 조화를 통한 경제의 민주화를 위하여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
(다)혼합경제시스템의 성격
대한민국헌법의 기본적인 경제질서를 단적으로 표현하면, 소위 자본주의의 자유경제(시장경제.Market system)질서를 기초로 하고, 그 위에 법률에 의한 국가의 규제와 조정을 통하여 사회주의적인 복지 국가를 지향하려는 혼합경제체제(mixed economy)의 성격을 갖고 있다 할 것이다. 더 부연하면  대한민국 경제체제의 기본적 성격은 이데올로기(Ideologie)차원에서는 민주주의 즉 경제적 자유주의(소위 자본주의, Capitalism)에 그 맥락을 갖고 있고,(주1)경제학(사상)의 계보에서는 주류경제학(Mainstream Economics)에 속하고 있다고(주2) 할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보충적으로 사회주의적인 복지국가를 지향하고 있는것이 그 특징이다.

(주1)이데올로기(Ideologie)의 맥락



해설: 기독교와 헬레니즘과의 접합성


헬레니즘의 모태인 고대 희랍의 철학(도덕관)은 국가의 역할을
인간성의 증진이라고 생각하였고, 부(富)보다는 개인의 고귀한 인간성(human excellence)과
자유인의 존엄성(virtue of freemen)을 중시하였다. 그리고 기독교(Christianity)는
인간의 완전한 자유, 즉 죄에서의 구원(Salvation)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JESUS CHRIST)의
복음이다.(요14:6, 요8:32, 갈5:1) 따라서  고대의 그리이스 사상과 기독교는
접합성을 갖고 중세를 거치면서 오늘 날의 자유 민주주의 이념의 뿌리가 되었다.


(주2) 경제학(경제사상)의 계보



해설: 간략한 경제학계보(Family tree of Economics)
(1)고전파(Classical School)의  배경: 독립과학인 아담 스미스(A. Smith)의  국부론(國富論, 1776)이 등장하기까지의 역사적 신학적(철학적) 배경은, 멀리 성경(Bible)에서부터 고대 그리이스의  철학자 들(Philosophers)의 사상, 중세의 스콜라 학자(Schoolmen)이며, 교부인 아퀴나스(T. Aquinas)의 신학사상, 근대의 실무가 들(Practitioners,기업가들 및 팜플렛 저자들)의 견해, 중상주의(Mercantilists)와 중농주의(Physiocrats) 정책사상 등이다.
(2)사회주의(Socialism) 경제사상: 사회주의 사상은, 아담 스미스의 동류인  리카르도(D. Ricardo)의 노동가치설을 이어받은 칼 맑스(K. Marx)가 그 원조가 된다. 20세기에 이르러서는  구 쏘련(U.S.S.R.),  사회주의 중국(China),  서구의 신 좌파(New Left)등이 그 계보를 이었다.
(3)주류경제학(Mainstream Economics): 주류경제학은, 아담 스미스를 시조로 하는 고전학파 (D. Ricardo, J. S. Mill 등), 신고전학파 (Neoclassical Economics, Walras,  Marshall 등), 그리고 말더스(T. R. Malthus)의 영향을 받은 케인즈 경제학((J. M. Keynes Economics)을 이은 후기 케인즈 학파(Post-keynes, Mainstream Economics)에 이른다.
자료: 'ECONOMICS', PAUL A, SAMUELSON, NINTH EDITION, McGRAW-HILL BOOK COMPANY.

(2)한국경제의 당면 과제
위에서 대한민국헌법에 의한 우리나라의 경제질서의 기본성격은 혼합경제체제임을 밝혔다. 이것은 독일의 바이마르 헌법(주1)을 모델로 한 매우 이상적인 경제시스템의 하나 임에 틀림없는 것 같다. 그러나 우리 헌정 반세기의 역사를 돌아보면, 우리 헌법의 혼합경제시스템은  그 이상을 구현하는 과정이 결코 평탄치 않는 것 같다. 특히 근간(2004년)에 나타나고 있는 우리 헌법의 자유경제(시장경제)원리와 복지경제(사회주의 경제)원리의 상반작용과 갈등현상을 우리는 다음 글(동아일보, 제25819호, 2004년 7월22일 목요일, A2, 사설)에서 읽을 수 있다.

주1.  1919년8월 11일 바이마르에서 열린 국민회의에서 제정된 독일 공화국 헌법.(근대의 새로운 민주주의 헌법의 전형이 됨)

관료.기업.학계.국민'市場수호'나서자(동아일보,제25819호, 2004.7.22, A2, 사설)
  경제가 큰일이다. 이대로 가면 주저앉지 않겠느냐고 걱정만 할 때는 이미 지났다. 그렇다고 차라리 무너질 대로 무너져야 확실한 교훈을 얻지 않겠느냐고 냉소해서는 더욱 안 된다. 어떻게 세운 나라, 어떻게 일군 경제인데 이대로 팽개친단 말인가.
  걱정도 냉소도 아닌 행동에 나설 때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부정하고 이참에 국가체제와 경제체제를 바꾸겠다는 무리가 있다면 그들에겐 어떤 충고도 소용없을지 모른다. 그런 쪽이 아니라면 대통령도, 정치인도, 경제정책 당국자도, 다른 관료도, 기업인도, 노동자도, 학자와 연구자도, 언론도 경제 부활과 민생 회생을 위한 자기 몫의 행동에 나서야 한다.
  이와 관련해 이헌재 경제부총리가 화두를 던졌다. "상황이 어려워도 시장경제가 자리를 잡아야 나라가 살 수 있다. 요즘은 한국이 진짜 시장경제를 할 수 있을 지에 대한 의문이 들기도 한다"는 발언이다. 그가 은행에서 자문료를 받은 게 비판받고 있지만 이는 따로 논란할 일이고, 근본적 문제는 '시장경제의 위기'다.
  왜 시장경제인가. 이것이 무너지면 세계적 경쟁에서 살아남기 어렵고, 경제도 민생도 시들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경제주체들의 자율과 창의를 존중하고, 경쟁 메커니즘을 통해 효율성과 공정성을 극대화하자는 게 시장경제다. 누구나의 이기심을 경제행동의 생산적 동기로 활용하는 게 유효하다는 인식이 바탕이다. 부작용은 국가가 교정하되, 기본적으로는 이익추구가 권력이나 정치 사회적 압력에 의해 침해되지 않아야 대다수를 위한 파이를 키울 수 있다는 것이다.
  시장경제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는 나라에서는 자본도, 고급 인력도, 첨단기술도 달아날 길을 찾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목격하고 있다. '반(反)시장주의로 역행하는 한국, 더 자본주의적인 중국' 이것이 현실이다. 중국이 시장경제를 외면했다면 구매력 기준으로 일본, 독일까지 제치고 미국을 추격하는 나라가 됐을까. 분배와 복지를 우선 시 하던 유럽 사회주의국가들이 침몰하거나 한계를 절감하고, 안정적 시장경제 실현에 매달리고 있음은 뭘 말하는가.
  대통령부터 입버릇처럼 말하는 '기업하기 좋은 나라, 투자하고 싶은 나라'는 다름 아닌 시장경제 원칙이 흔들림 없이 작동하는 나라다. 그럼에도 지도층이 반 기업, 반 부자 정서를 부추기고, 주택 같은 사유재산을 공공재(公共財)라 우기고, 기득층과 비(非)기득층을 편가르고, 무엇이든 빼앗아 나누는 게 선(善)인 듯이 바람을 일으킨다면 그 결말은 자명하다. 또 내가 싫으면 법을 안 지켜도 되고, 인기만 얻을 수 있다면 시장경제 원리는 언제나 짓밟을 수 있다는 행태가 정치권과 노동운동 현장, 심지어 입법 활동에서까지 만연한다면 그 해독(害毒) 역시 뻔하다.
  경쟁 제한적 규제 사슬, 개혁으로 포장한 기업활동 제한, 원가공개 등 시장수급 원리를 무시한 정책, 부유세 도입 주장 등을 보면서 '한국이 시장경제로부터 멀어지는구나' 하는 판단과 의심이 커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우리 경제는 앞뒤도 안 맞는 몇 가지 재정정책, 세금정책으로 풀 수 있는 단계는 지나버린 구조적 위기 상태다. 시장경제를 계속 흔들어 대고서는 누구를 정책 책임자로 앉혀도 소용없다.
  그렇다면 대통령부터 입장을 확실하게 밝히고, 정치권도 색깔을 분명히 해야 한다. 관료들도 눈치만 봐서는 안 된다. 재계도 도망만 가서는 안 된다. 지식인 그룹도 침묵해서는 안 된다. 모두들 음유시인처럼 선문답 같은 소리만 해서는 안 된다. 노동운동가들에게도 경제 살려 전체 노동자가 함께 사는 길을 택하라고 호소하고 싶지만, 이들이 막무가내라면 과격노동투쟁의 피해자인 더 많은 노동자들, 그리고 노동할 권리를 빼앗긴 실업자들이 지금 같은 노동운동에 반대해야 한다.
  세계는 질주하는 데 우리만 이념의 귀신에 씌어 국가체제와 경제체제를 흔들고 뒤튼다면 기다리는 건 추락뿐일 것이다.

4.맺음 말
필자는  우리사회의 대부분의 지도자들과  성경을 가르치는 분들에게 성경의 경제원리를  좀 더 쉽게 이해시켜 드려서, 우리가 회복해야할 진정한 경제시스템(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경제질서)이 세워지기를 바라서 이 글을 썼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인지?  즉  우리나라 경제의 당면과제의 의미와 그  대책이 무엇인지를 독자 각자가 위의 글을 참고하시면서 해답(solution)을 내리시기를 바랍니다.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에게 하나님의 은총과 지혜가 충만하시기를 기도 드립니다.
(게재일: 2004.7.27)

부록(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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